[칼럼] [21세기 징비록] 잊지 말아야 할 중국과의 전쟁

지난 일요일인 7월 27일은 6·25전쟁 휴전협정이 발효된 지 72년째 되는 날이다. 해마다 이 날이 되면 우리 정부뿐만 아니라 자국의 군대를 파병했던 대부분의 국가에서 기념식을 개최해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낸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기억하고 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만 3년 1개월간 계속됐다. 그 기간 동안 쌍방은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 선을 포함하는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서울이 두 번씩이나 적의 수중에 넘어가는 아픔도 있었다.
당시 북한군은 완전 편성된 10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사단 등 지상군만 18만 명이 넘었고 해군과 공군도 1만9000여 명에 달했다. 이에 비해 우리 국군은 편성도 제대로 되지 않은 8개 보병사단으로 총병력도 10만4000여 명에 불과했다.
국군의 방어 의지는 대단했으나 소련제 전차와 아포, 항공기로 무장한 북한군을 대적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북한군의 진격은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이 사태가 지속될 경우 한반도는 며칠 사이에 완전히 공산화될 것이 뻔했던 상황에서, 한국을 구출해 준 것은 바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였다.
6·25전쟁에는 미국을 비롯해 총 16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실상 참전국 수는 훨씬 늘어난다. 멕시코 젊은이들 10만여 명이 미군의 일부로 참전했고 프랑스 보호령이었던 모로코,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수리남, 아일랜드와 같은 영연방국가 등이 모두 파병국가였다. 전체적으로 6·25전쟁에 참전하거나 지원한 국가들의 수는 총 60개국에 달했고, 이는 당시 전 세계 독립국가 93개국 중 64%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여기에 추가로 기억해야 할 국가가 있다. 바로 대만과 일본이다. 1949년 공산군에게 패해 대만으로 철수한 장개석 정부는 전쟁이 발발하자 3개 사단 규모의 지상군을 파병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러나 확전을 우려해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한국군 1사단 내 200여 명의 화교로 구성된 특수부대가 만들어지자 대만은 교관을 파견하고 훈련을 담당했다.
중공군이 전선에 나타나기 시작한 1950년 11월 이후 이들은 적지 후방에서의 정보 수집, 통역 등 다방면에서 혁혁한 기여를 했다. 전쟁이 끝나 해체될 당시 불과 20여 명만이 생존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외국인이란 이유로 우리 정부로부터 전혀 보상을 받지 못했다. 그런 외면은 대만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2의 조국을 위한 희생에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던 것이다.
또 한 국가는 일본이다. 전쟁 초기 소련은 북한에 4000여 발의 기뢰를 보냈고 북한은 이 기뢰들을 원산과 흥남·진남포·인천·군산·목포항 등 선박 이동로에 부설했다. 이로 인해 선박들이 침몰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동경의 미 군정사령부에서는 태평양전쟁 시 잔존 기뢰 소해(掃海)를 위해 투입했던 일본 민간 소해대를 한반도에 급파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해군에 복무하던 이들로 소해의 베테랑들이었다. 소해정 46척과 1200명으로 구성된 이들 소해대가 없었다면 흥남철수작전의 성공도 기약할 수 없었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실로 6·25전쟁은 공산주의 침략에 전 세계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힘을 합쳐 한국을 지켜낸 위대한 역사였다. 이들 국가가 보낸 병력은 총 195만7000여 명이었는데 그중에 15만10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중국군 500만 명이 투입되어 북한을 돕지 않았다면 전쟁은 조기에 종결됐을 것이고 희생도 이만큼 크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 정작 당사국인 한국은 ‘실용외교’(實用外交)라 하여 당시 중국과의 치열한 전쟁이 있었음을 잊은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 자유진영 국가는 중국이 벌인 이 지옥 같은 전쟁을 잘 기억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출처 : 자유일보(https://www.jayupress.com)